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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진도 왜덕산에 제비가 날아오는 날

  • 진도투데이 zkffos@hanmail.net
  • 입력 2020.12.17 10:12
  • 수정 2022.09.2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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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진도 왜덕산에 제비가 날아오는 날

日 지도자들 왜덕산 찾아와 화해와 용서의 결실 맺기를 기대
2013년 한중 정상회담 통해 적군묘지 中軍 유해 송환 ‘화해’
 

/문관현 (가칭)동북아역사평화공원조성추진위원회 부위원장(현 연합뉴스 편집국 다국어 뉴스 부장)

“녹진 만호가 시체 230구를 거두어 묻었다. 피난민들과 적병의 시체가 섞여 있었다. 녹진수영 뒷담이 10자쯤 무너졌다.” -김훈, 칼의 노래-

내 고향 진도에 왜덕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솔직히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필자는 당시 외교안보 전문기자로서 한국전쟁에 대한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개인적으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에 조성된 ‘북한군·중국군 묘지’, 일명 적군 묘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전쟁 주체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국 곳곳에 북한군과 중공군 전사자 유해들이 묻혔다. 대전광역시 서구 괴곡동 공설묘지와 경기도 남양주시 백석면 복지마을, 강원도 인제군 광치령 등지에 ‘적군묘지’라는 이름으로.

비록 적군이라도 사망하였을 경우 매장하고 봉분을 세워 존중해야 한다는 제네바협정 추가의정서 34조에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반공의식과 행정기관의 관리 소홀, 지역주민의 민원 제기 등은 적군묘지 영혼들에게 편안한 안식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에 따라 정부는 1996년 7월 전국에 흩어져 있던 북한군과 중공군 유해 109구를 수습해 북한을 바라보는 임진강변 언덕에 묻어줬다.<사진>

한국전쟁 중 전사한 군인이 대부분이지만 김신조 청와대 기습사건 등 무장공비로 침투해 사망한 공작원들이 다수 포함됐다.

북한이 도발행위를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우기며 시체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적군묘지의 북향 배치는 죽어서라도 고향을 바라보거나 넋이라도 휴전선을 넘어가라는 배려아닌 배려에서 비롯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6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파주 적군묘지에 묻힌 중국군 유해들을 넘겨주고 싶다고 제의했고, 2014년 437구, 2015년 68구, 2016년 36구, 2017년 28구, 2018년 20구 등이 중국으로 돌아갔다. 70여 년 전 압록강을 도하할 때 총구를 앞세운 적군이었지만 싸늘한 한 줌의 재로 변했다.

개인적으로 관심 있게 지켜본 대목이 중국 정부의 입장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주체가 정규군 인민해방군이 아니라 지원병인 중국인민지원군이었다며 전쟁 참여에 대한 책임에서 한 발 물러서 있었다.

민간인들이 자원해 전쟁터로 달려갔기 때문에 중국 정부 차원에서 사과를 하거나 책임을 질 수 없다는 매우 뻔뻔한 태도였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중공군의 시신을 수습해 공동묘지를 조성한 뒤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정중하게 유해 반환을 제의하니 더 이상 ‘나 몰라라’할 수 없게 됐다.


국 정부는 한국으로부터 넘겨받은 유해들을 위해 한국과 가까운 랴오닝성 선양에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만들고 전사자들을 이곳에 안치했다. 사실상 한국전쟁 참여를 인정한 셈이고, 한국 정부의 화해 방식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20년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던 가을날 오후 왜덕산을 방문했다. 전남 진도군 고군면 내산리 산162번지. 대한민국 행정지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400년 넘게 구전으로 전해 온 왜덕산의 실체에 다가간 순간이었다.


주 적군묘지는 알았지만 진도 왜덕산은 왜 몰랐을까 하는 자괴감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최근 왜덕산 입구에서 우연히 만난 지역 언론 종사자들로부터 전해들은 왜덕산 스토리는 더욱 구체적이었고, 충격적이었다.<사진>

진도 주민들은 바다에서 죽은 시체는 잘 수습해야 한다는 풍습에 따라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일본 수군의 시체들이 바닷가로 떠밀려 오자, 수습해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줬다.

왜덕산 일대에는 해묵은 일본 수군의 묘지가 100여 기 존재했지만 현재는 무분별한 개간과 풍화작용 등으로 절반 가량이 사라졌다.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던 진도 어민들은 물에 빠진 시체를 보면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대구 떴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어 시체를 거둬 무덤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고기잡이도 되지 않고 반드시 항해 중에 고난을 당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일본 수군 망자에 대한 예우는 독특한 진도의 장례문화를 배경으로 하며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드문 사례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 수군은 야만적으로 조선인의 코를 잘라 전리품으로 가져가 코무덤을 만들었지만, 진도 주민들은 적군의 시신을 거둬 양지 바른 언덕에 묻어주고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하나의 전쟁에서 보기 드물게 대조적인 두 개의 무덤이 탄생한 것이었다.

제네바 협정이 공포되기 357년 전에 생명 존중에 대한 소중한 의식이 진도 바다에서 벌써 치러졌던 셈이다.


그러나 명량대첩에 참패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멀리 당사도까지 빠져나간 틈을 타 민간인들에 대한 복수극을 벌였다. 울돌목에서 패배에 대한 치졸한 분풀이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왜덕산 앞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들어버렸다. 침략과 패배, 양민학살이라는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지워진 셈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현해탄보다 깊었던 역사적 갈등의 골이 진도 왜덕산에서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성급할지 모르지만 가능성만큼 충분히 확인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미다라이 미노루 씨는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침략을 해왔습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까지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끼쳐 왔습니다”라고 침략 사실을 인정하면서, “앞으로 일본인들은 사죄하고 반성하는 자세로 한일의 평화가 지속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용서를 빌었다.


비록 민간인 차원에 불과하지만 놀라운 자기반성이고 외면할 수 없는 역사인식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교류·협력의 가교 역할을 담당했던 조선통신사(일본에서는 일본국왕사) 역할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전쟁상태 종결을 위한 강화교섭과 포로 송환, 국정 탐색, 막부 장군의 습직 축하 등으로 전환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뜻한 봄날에 날아오는 제비 중에는 일본에서 오는 경우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싶다. 제비가 날씨가 추워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전령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일본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진도 왜덕산을 찾아와 화해와 용서의 결실을 맺었으면 한다. 그 가능성이 벌써 수백년 전에 진도 바다와 왜덕산에서 충분히 확인되지 않았는가.


왜덕산 퍼즐을 맞추면 한국과 일본이 상생의 넓은 바다로 가는 지도가 완성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어 역사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헌신한 분들의 노고에 감사 드린다. 

끝.

문관현의 통일열차 https://blog.naver.com/miguel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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